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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랑이야기/트렌드&라이프

영화 '사도' 보기 전에 꼭 알아두어야 하는 역사 상식





여러분, 혹시 영화 '사도'를 보셨나요? 최근 500만 관객 동원을 앞두고 있을 만큼 기세가 대단한데요. '사도'의 흥행 열풍으로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에는 평소보다 많은 관광객으로 북적거릴 정도라고 해요.

 

역사 속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사도세자와 영조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사도' 역사가 영화의 스포일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정통 사극 장르를 표방했는데요오늘은 영화 '사도'를 보러 가기 전 알아두면 좋은 역사 상식에 대해 알아보려고 해요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나 소설 등 시대마다, 작품마다 다르게 조명되는 사도세자와 그를 죽인 아버지, 영조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지금부터 행복한: D와 함께 영화보다 재미있는 역사 속 이야기로 떠나볼게요.




조선 역사상 가장 슬픈 가족사, 영화 '사도'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앞서 이야기했듯이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이미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이며, 드라마, 소설 등으로 많이 다뤄졌던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래서 영화관을 찾는 관객 대다수가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데요영화 '사도'의 이야기는 임오화변이 일어나기 전,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41살에 사도세자를 얻은 영조는 생후 1년 만에 아들을 세자로 책봉할 정도로 극진한 사랑을 베푸는데요재위 기간 내내 왕위 계승 정통성 논란에 시달린 영조는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귀한 아들인 세자 만은 모두에게 인정받는 왕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직접 책을 지어 세자에게 읽힐 정도로 공을 들이게 되죠

 

하지만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아들은 나이가 들수록 자유분방한 기질을 드러내며 갈등이 시작됩니다그리고 그 갈등은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에서 극에 달하게 되는데요. 사도 세자는 그런 아버지의 질책과 비난 속에 늘 스트레스를 받고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고 다그치기만 하는 아버지를 점점 원망하게 돼요. 그리고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의 이야기가 펼쳐지게 된답니다.




영화 '사도'를 보기 전 꼭 알아두어야 하는 역사 상식




 

1. 영조는 왜 사도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였을까?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1762 5월 사도 세자가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살해된 임오화변. 사도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씨가 먼저 죽일 것을 청하고 영조가 죽일 것을 명한 후, 장인인 홍봉한이 앞장서서 집행한 이 사건은 조선의 역사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로 알려졌는데요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것일까요

 

 

영국의 세계적 역사학자인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책에 따르면 역사란 과거 사실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과거의 어떤 사건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해석, 평가하여 재구성할 때 확립되는 것이라고 말 합니다.

 

다시 말하면 조선의 역사 또한 기록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기록한 사람의 평가가 반영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인데요임오화변 또한,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기록한 역사 『헌륭원지』와 실록이 기록한 역사,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기록한 『한중록』속의 그 날의 기억이 조금씩 다른 걸 보면 어떤 것이 진짜 '사실'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다만, 실록을 통해 본 임오화변의 전후 관계를 살펴보면 임오화변은 1762 5 22일 나경언의 고변에서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나경언의 고변은 사도세자가 그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를 죽이려 했고, 비구니를 궁중에 들여 풍기를 어지럽혔으며, 부왕의 허락도 없이 평양으로 몰래 놀러 다녔고, 북성에 마음대로 나가 돌아다닌 일 등 10여 가지 비행을 들어 세자의 비행을 고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결국 노론의 시파와 벽파의 대립으로 인한 모함으로 판명돼 나경언은 처형을 당하고 말지만, 세자의 비행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다시 확대되었어요바로 사도세자가 아버지이자 임금인 영조를 죽이려 했다는 것인데요. 그 사실을 영조에게 알린 것은 다름 아닌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이었습니다.

 

선희궁은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이 100명이 넘는다고 고하면서 '내가 죽는 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성군까지도 위기에 처해 있기에 고민을 했고 고민의 결과 이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사도 세자가 영조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은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을 통해서도 '사도 세자가 칼을 들고 영조가 있던 궁궐로 향했다'는 것을 추론해 볼 수 있는데요.

 

결국, 영조는 아들이 미치거나 비행을 일삼았기 때문에 처분을 내린 게 아니라 자신을 위기에 빠뜨리려 했기 때문에 죽인 것이 아닐까요? 영화 '사도' 또한 이런 추론을 기본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답니다




 

2.  영조는 어떤 군주였나?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조선 왕조 역대 임금 중 가장 긴 52년 동안 왕위에 머물렀던 영조는 권력욕이 강한 인물이었어요. '탕평 군주'로 알려진 영조는 붕당정치의 폐단을 없애고자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고 장악력도 뛰어났던 '정치가'였습니다. 하지만, 감정적인 부분에서는 사람을 대할 때 미숙한 부분이 많았다고 볼 수 있어요.

 

아들인 사도세자에게는 물론이고 신하들에게도 워낙 화를 잘 내서 신하들이 화를 그만 좀 내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하는데요그의 이런 성격은 천한 무수리 출신의 엄마에게서 나왔다는 태생적인 콤플렉스에 기인하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답니다.

 

탕평 정치를 꿈꿨지만 노론의 정치적 세력을 기반으로 할 수 밖에 없었던 영조는 아들이 자신처럼 훌륭한 임금이 되기를 바랐지만 공부에 별 뜻을 보이지 않으면서 둘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역사학자들은 사도 세자가 광인이 돼버린 데에는 아버지 영조의 지나친 엄격함이 큰 이유가 됐을것이라고 분석하는데요. 칭찬보다는 질책을 더 많이 하고, 압박을 더 많이 줬던 영조의 기대를 따라가지 못했던 사도세자는 아버지 앞에서 더 위축돼 버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3.  역사서에 기록된 사도 세자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영조 11 1 21일에 태어나 1년 만에 세자로 책봉된 사도세자는 만 2세부터 한자를 배워 육십여 자의 한자를 쓸 만큼 영특한 '영재'의 기질을 보이는 아이였다고 해요. 영조가 “비단과 무명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으냐?”라고 묻자 “무명이 더 나으니 무명옷을 입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정도였는데요.

 

늦은 나이에 낳은 아들이 이렇게 특출 난 것을 보고 영조 또한 세자를 몹시 귀여워하며 팔불출 소리를 들은 만큼 자랑하며, 심지어 대신들 앞에서 글씨를 쓰게 하여 나눠주기도 했다고 전해져요.

 

하지만 본격적인 세자수업이 시작된 이후 새벽에 일어나 밥 먹고 문안 인사를 드리는 시간 외에는 모든 시간을 공부만 해야 했던 세자는 공부보다는 무예를성리학의 교리를 담은 유교 경전보다는 잡학에 관심을 갖게 된답니다. 사도세자는 공부보다는 호방한 무인적인 기질과 체격을 갖추고 있었고. 활을 쏘면 백발백중이었으며 나는 듯이 말을 몰았다고 전해지는데요. 그래서 학문보다는 무술에 더 많은 관심을 끌게 된 아들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고 해요.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여러 가지 기록들에도 나와 있듯영조는 어린 사도 세자에게 무척이나 무섭고 엄격한 아버지였는데요.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였을까요. 세자는 심지어 4개월 동안 영조에게 문안인사도 드리지 않을 만큼 영조를 불편해했답니다. 그리고 영조의 지속적인 질책과 훈계는 점차 아들의 마음을 병들게 했는데요. 사람의 발소리만 들려도 극도로 불안해

한다거나, 가슴이 답답해서 울음이 나고 마음이 아프니 약을 찾아봐 달라고 호소하는 편지 등을 통해 세자의 상태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어요

 

이런 세자의 정신적인 병은 때때로 극단적인 행위로 드러나기도 했는데요. 한중록에는 사도 세자가 내관, 궁녀 등을 잔혹한 방법으로 매질하거나 살해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노론이었던 자신의 가문을 위해 쓴 책이기 때문에 왜곡이 많다는 평가도 받고 있지만 이 책 이외에도 많은 역사서를 통해 사도 세자의 살인에 대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어요. 다음은 나경언의 고변 이후 영조가 세자의 살인을 언급하는 부분입니다.

 

 



임금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에 행역하고, 북성으로 나가 유람했는데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도 세자를 지켜보던 영조는 결국 뒤주에 세자를 가두게 되고 세자는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죽게 돼요 결국, 사도세자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그 능력을 미처 꽃피우지 못한 비운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지금까지 영화'사도'를 보기 전 알아두면 좋을 역사 상식에 대해 알려드렸는데요. 어떠셨나요? 조선 역사상 가장 슬픈 가족사를 다룬 사도세자와 영조의 이야기~! 과연 영화에서는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풀어나갈까요? 영화관에서 직접 확인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