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에 벌써 가을이 저만치 가버린 듯해요. 이제는 가만히 집안에 웅크리고 있어야 할 것처럼 마음까지 움츠러드는데요. 11월에도 풍요로운 가을의 느낌을 한껏 간직한 순천에서 기지개 켜보시면 어떨까요?
순천(順天)은 ‘순한 하늘 아래 터’라는 뜻의 이름처럼 푸근하고 안온한 기운을 가진 곳이에요. 광활하게 펼쳐진 황금빛 갈대밭과 청정한 갯벌 덕에 풍부한 해산물의 보고이자 대한민국의 생태수도라는 명칭이 더없이 어울리는 곳이랍니다.
순천이 가진 여유와 풍요로움을 만끽하려면 우선 아무 식당에나 들러 밥상을 한번 받아보는 것이 좋은데요. 보성, 광양, 여수 등 주변에서 모아온 신선한 재료들로 인심을 가득히 담아 내온 밥상을 마주하다 보면 내가 순천이 아닌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잠시 억울하게 느껴질 지도 몰라요.
순천만 평야 70만평을 가득 채우는 갈대숲은 순천이 표방하는 자연 생태적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에요. 끝없는 금빛 갈대들 사이로 나무 데크가 길게 이어져 있어 누구라도 산책하듯이 전경을 만끽할 수 있지요.
바람이라도 한번 불면 파도처럼 크게 흔들리는 갈대들의 움직임이 눈길을 빼앗아요. 나무 데크 아래를 손가락질 하며 아이들이 호들갑을 떨고 있다면 이는 분명 갯벌 위를 분주히 돌아다니는 짱뚱어와 게들 때문이에요.
갈대숲과의 아쉬운 연애를 마치고 나무 데크 끝에서부터 20분 정도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용산 전망대에 다다른답니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정면으로 받으며 서 있으면 곧 붉은 해가 S자로 크게 휘어지는 강물이 펼쳐져요. 이때만큼은 커다란 사진기를 든 전문 사진가도, 핸드폰을 손에 쥔 아주머니들도 모두 한 마음 한 모습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어요.
운영: 09:00-18:20
입장료: 성인 2,000원 청소년 1,500원
홈페이지: http://www.suncheonbay.go.kr/
* 생태체험선은 바닷물이 빠지는 간조시간에는 운행을 중단하므로 홈페이지에서 미리 운행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좋아요.
낙안읍성 사람들의 삶은 마을이 내려다보는 뒷산과, 마을을 아늑하게 지켜주는 단단한 성채, 손으로 켜켜이 쌓아올린 돌담과 지붕을 폭신하게 덮은 초가가 느릿느릿 흘러가요.
조선시대의 객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이곳은 모든 것이 너무나 그럴듯하게 어울려 처음 이곳에 들어선 사람들은 이곳을 잘 꾸며놓은 테마파크나 드라마 세트장으로 착각하기까지 한다는데요.
하지만 낙안읍성은 그런 인조 공간과는 달라요.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은 관광객들과 그에 대비되는 수수한 복장의 마을 주민들, 한적해진 골목길 낮은 돌담 옆에 잠시 서 있노라면 내가 살던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마저 거슬러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면 이 공간을 배경으로 살았던 옛사람들의 삶과 지금 이곳 주민들의 삶, 그리고 내가 집이라 부르며 살아가고 있는 도시의 공간이 서로 교차하며 마음속에서 떠올라요. : )
입장료: 일반 2,000원 청소년 1,500원
운영시간: 동계 09:00-17:00
* 낙안읍성 안의 많은 초가집들이 민박을 운영해요. 단, 읍성 안에서는 야외 바비큐 요리가 금지되어 있어요.
색이 다 빠져버린 산을 찾아가봐야 볼게 뭐있느냐고 말하는 분들에게는 순천 선암사 길을 한번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입구부터 고즈넉한 산사의 길을 따라 흙냄새 맡고 물소리 들으며 천천히 올라가다보면 계곡 위에 걸쳐진 아름다운 무지개다리가 나타나요.
오욕과 번뇌를 씻고 선계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가진 보물 400호 승선교인데요. 다리 아래 냇가에서 바라다보면 그 뒤에 서 있는 아름다운 누각인 강선루까지 한 눈에 쏙 들어온답니다.
곧 이어 나타나는 연못 삼인당은 ‘모든 것은 변하며 머무르는 것이 없고, 나라고 할 만한 것도 없으며, 이를 알면 열반에 든다’는 불가의 가르침을 담고 있어요. 운수암으로 오르는 담길 옆의 매화나무들은 이듬해 봄에 꽃을 피울 새순들을 한가득 품고 있답니다.
아직 멀기만 한 화사한 봄날을 기약하며 찬바람 버티고 서 있는 나무들을 보니 괜스레 짠해지기까지 하는데요. 산길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넘어가는 이곳의 굴목이재 길을 ‘한국의 산티아고 길’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한다고 해요.
선암사에 다다르기 전에 나타나는 야생차 체험관은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러봐야 할 곳이에요. 성큼 찾아온 겨울의 찬 기운을 뚫고 오후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누마루에 앉아서 몸과 마음을 데우는 향기로운 차 한 잔을 마시면 몸과 마음이 쇄락해지는 기분을 느껴져요.
야생차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룻밤 묵어갈 수도 있으니 고즈넉한 산사에서의 하룻밤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좋은 기회를 만들 수도 있겠네요. 늦은 가을 선암사 찾아가는 길은 지친 몸과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는 보물들을 만나러 가는 여정이나 다름없어요.
- 선암사
운영: 동계 07:00-18:00
입장료: 일반 1,500원, 학생 1,000원
- 야생차 체험관
운영: 09:00-18:00, 월요일 휴무
비용: 다례체험 2,000원, 차 만들기 체험 5,000원, 한옥 명상체험 2-3인실 5만원
11월의 찬바람을 맞으며 여행을 하다보면 몸을 따뜻하게 해줄 국물요리들이 생각나요. 이에 순천에서 맛볼 수 있는 진국요리들을 소개해 드릴게요. 순천만 갈대숲을 걷다가 허기를 느낀 사람이라면 공원 입구 식당에서 맛 볼 수 있는 걸쭉하고 구수한 짱뚱어탕을 추천!
순천만의 청정한 갯벌을 뛰어놀던 참 못생긴 생선 ‘짱뚱어’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남성의 스테미너와 여성의 미용에 그렇게 좋다고 해요. 그 중에서도 <대대선창집>은 반찬수를 줄여 음식물쓰레기를 줄여보자는 순천시 정책에 매우 느리게 반응하는 집이에요. 장어구이까지 시키면 닭백숙을 포함한 30여 가지 밑반찬이 상에 깔리니 다음 여정을 위한 에너지 보충에 이보다 좋을 수는 없겠죠?
순천시내 중앙로 근처에서 점심식사 시간을 맞이했다면 뜨끈하고 개운한 <원조동경낙지>의 낙지전골을 추천해요. 정말로 아무도 모르고 주인만 아는 비장의 뽀얀 육수로 전골을 끓여내는데, 달큰하면서도 칼칼한 국물 맛이 일품이에요.
빨간 국물을 밥 대접에 얹고 김 가루를 솔솔 뿌려 비벼먹는 것이 제대로 먹는 방법! 커다란 항아리에 담아주는 물김치와 환상의 궁합을 보인답니다. 메뉴가 단 한가지라 고를 필요도 없이 몇 사람인지만 말하면 되는데, 식사시간에는 손님들이 많아 꽤나 기다릴 수도 있다는 점~~!
순천 주변 볼거리들을 둘러보고 시내로 돌아오면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진답니다. 저녁식사에 더불어 한잔할 거리를 찾는 분들이라면 가장 먼저 <현빈네>의 돈족탕을 대접하고 싶은데요. 구수한 돼지뼈 국물에 돼지고기의 단맛과 콜라겐의 기름진 맛이 잘 어우러진 별미중의 별미예요.
떡까지 넣어 더욱 걸쭉하고 푸짐해진 돈족탕 한 냄비면 장정 2~3명이 식사와 술안주까지 하기에 충분해요. 본래 술파는 작은 주막이므로 비오는 날이면 두툼한 파전에 막걸리 한사발로 종목을 변경해도 굿!
글 + 사진 : ‘여행의 달인, 여수 순천편’ 저자 김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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